2천6백 여 년 전 (BC648) 고대 올림픽 종목으로, 복싱과 레슬링의 혼합 경기인 팡그라존(PANCLATION)이란 운동이 킥복싱의 원형적인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로마의 궁전 경기장에서 사형수나 전쟁 포로들에게 결투를 시켜 승자에서 감형 또는 사면을 시켜주는 한편, 왕족들은 흥미로은 관전을 해 왓던 것이다. 경기형태를 보면 손등에 철가죽을 감고, 죽을 때까지 혈투로서 처참한 경가를 하였다고 문헌에 전하여지고 있다.

킥복싱은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1964년 9월 당시 대한 태권도협회 오도관 전남 본관장인 구판홍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태권도에 대한 지도보급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강한 무술을 만들고자 태권도, 복싱, 유도, 레슬링 등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절충하여 치고, 차고, 던지고, 꺾고, 조르는 종합 무술로 체계화하여 킹투기라는 무술을 독창적으로 창안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킹투기가 각종 무술 중에서 가장 과격한 최고의 격투 무술로써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 1968년 4월에 일본의 노구치오사무 기꾸 복싱 회장이 킹투기의 발상지인 광주에 와서 구판홍 창시자와 최초의 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의 노구치오사무회장이 무에타이라는 태국의 전통무술과 극진가라데를 접목시켜 만든 기꾸복싱과 한국의 킹투기를 킥복싱으로 명칭을 통일하기로 하고, 한일 간의 국제 교류를 합의하였다. 그로 인하여 킥복싱이라는 무술이 한국에서 최초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1968년 12월 12일에는 구판홍 회장 창시자가 문교부로부터 한국 킥복싱협회의 사회단체 등록(제29호) 승인을 받았으며 당시 동양방송국에서 킥복싱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태국코치를 초청하여 한국대표선수 훈련을 받게 하였다. 대표선수명단은 플라이급 김명수, 반탐급 김광춘, 라이트급 김정대, 웰터급 이현방, 미들급 류병호, 헤비급 김광기 선수들이었다. 그 후 1969년 12월 26일 일본 원정을 위해 한국 킥복싱선수단을 결성하였는데 구판홍 협회장이 선수단장을 맡고 플라이급 김종현(전주), 반탐급 김광춘(광주), 페더급 박재혁(서울) 선수등이 선발되어 일본 동경 구락구엔 경기장과 대판 부립 체육관에서 일본 선수들을 모조리 때려눕혀 KO로 전승함으로써 재일 동포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에 찬 눈물을 흘렸고 일본 국민들은 한국 선수들의 강인한 체력과 투지 그리고 묘기 백출하는 기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구판홍 창시자께서는 킥복싱을 독창적으로 창안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고 협회를 결성 국가 공인 단체로 정식 발족함과 아울러서 6체급 챔피온을 단생시켜 최초로 국제무대에 원정하여 일본 선수들을 쓰러트림으로써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통쾌 무비한감을 느꼈다고한다.그 후 협회의 내분과 불협화음 때문에 해산시켜 버리고, 1970년 4월 13일 재차 협회의 사회단체 등록을 (제 31호)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공인 체육단체로 정식 발족하게 되었고, 전국 각처에 킥복싱 도장을 설치하였다.
사범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판홍 창시원장을 최고의 지도자로 하여 서울(김정대, 강영복, 조향동), 강화(배성실), 청주(최병학), 대전(최창열), 대구(예영달), 부산(임천규, 김대훈, 구본근), 광주(김광춘, 이현방), 전주(김귀진, 김현식), 목포(구판봉) 사범 등이 최초로 킥복싱을 지도 보급하였던 것이다.

1977년 8월 30일은 태국의 방콕 안디라 호텔에서 거행된 동양 킥복싱 연맹 결성 총회에 한국 킥복싱협회의 회장으로서 구판홍 창시자가 참석하였고, 일본은 하기와라 회장, 태국은 룸피니 스타디움의 차이디시아지트 회장이 참석하여 동양 연맹의 회장에는 태국의 차이 회장, 부회장에는 한국의 구판홍 회장과, 일본의 하기 와라 회장이 각각 선임됨으로서 킥복싱인들의 염원인 동양 킥복싱 연맹이 정식 출범하였고, 동양챔피온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

1977년 9월 17일에는 동양 킥복싱 연맹 창립기념 한국, 태국, 일본의 챔피온들이 대거 출전하는 국제 킥복싱 대회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하였고  우리나라 킥복싱의 실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1978년까지 수많은 국내 및 국제 경기를 주최하여 국민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MBC TV와 KBS TV 중계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킥복싱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나 킥복싱의 지도력 부족과 협회의 무능함으로 훌륭한 선수 발굴 육성에 활발하지 못하여 비통한 恨을 체육사에 남긴 채 1978년 말 문교부에 해체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이후 킥복싱의 문하생 또는 직간접적인 지도와 영향을 받은 자들이 각종(단체 이름만 다름)다양한 명칭을 붙이고 생명력이 죽은 채 철학도 없이 춘추 전국 시대를 방불케 여러 단체들이 할거하고 난무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난무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이 행하고 있는 경기행태가 손에는 글러브를 끼우고 발로 차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킥복싱을 그대로 유사하게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킥복싱인들의 염원인 동양챔피온 한번 탄생시켜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침체 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이 후 1988년 10월 20일 전국 각지의 킥복싱 원로 23명과 필자가 광주 건강회관에 모여 킥복싱 창시자인 구판홍 선생을 총재로 모시고, 초대 반탐급 챔피온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 김광춘 원로를 연수 원장으로 추대하여 한국 킥복싱 총연맹이란 명칭으로 킥복싱의 발상지인 광주에서 다시 새 출발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1988년 12월 전국의 98개 체육관 관장과 킥복싱인 400여명이 한국 킥복싱 총연맹 창설에 대한 동의 안에 체결하고, 1989년 1월 7일 광주 한일회관에서 253명이 참석하여 한국 킥복싱 총연맹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1989년 2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한국 킥복싱 총연맹 주관으로 국내 및 국제 경기를 17차례 개최하여 전국에 알리게 되었으며, 당시 대통령령 제 1055호에 의하여 단체업무가 체육부에서 전국 각 시도에 이관됨에 따라 1991년 12월 24일 한국 킥복싱 총연맹이란 명칭으로 당시 광주광역시에 사회단체 체육 제 1호로 등록하여 체육부에 보고 승인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공인 체육 단체로써 1992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한국 킥복싱 총연맹의 킥복싱 원로들과 킥복싱인들이 합심하여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100여 차례의 국내 및 국제 경기와 행사를 하며 킥복싱의 정통성과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나,
이후 2005년부터 운영미숙으로 한국 킥복싱 총연맹은 사실상 해체 되어버리고 명분만 유지한 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많은 킥복싱인들 실질적인 협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2007년에 초대 참피온 김광춘 원로를 중심으로 뜻있는 이들이 모여서 한국킥복싱의 전통성을 이은 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김광춘 원로를 총재로, 80년대 전국대회에서 우수한 기량을 발휘했던 송칠석 드림코리아 회장을 협회장으로 추대하여 한국 킥복싱협회를 재건하여 문광부 제 32조 규칙4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 2007-1호로 재탄생 시킨 것이다. 그 이후 연간 사업계획에 따라 매년 코리아 그랑프리란 명칭으로 전국대회 개최로 우수한 파이터를 육성 배출하여 국·내외 메이저 대회에서 특출한 실력으로 한국킥복싱의 명예와 전통을 이었으며, 연말 킥복싱인의 밤 행사를 통해 킥복싱인의 단합을 꾀하고 있으며, 아울러 80년대 한정본으로 발간된 킥복싱 교본에 대한 현재의 다양한 무술의 장점을 수용하여 교본 재발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킥복싱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어 협회 등록체육관의 일선 지도자들에게 체계화되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프로그램을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현 송칠석 협회장은 한국킥복싱 50주년인 2014년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 하면서 “더! 역동적으로!, 더! 수준높게!, 더! 저변확대!” 란 슬로건을 내걸고 킥복싱인의 위상과 협회의 발전을 위해 원로, 전 협회 임원들과 일선지도자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협조하면서 한국킥복싱의 발전과 후진양성, 저변확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 송칠석회장을 비롯한 현 지도부는 수준높은 협회운영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킥복싱협회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은 무도협회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